아동기 외상은 단순히 일시적인 충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장 과정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또래와의 관계 형성에 있어 외상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며, 사회성 발달을 저해하거나 반대로 특정 행동 양식을 고착화시키기도 합니다.
저 역시 상담 현장에서 만났던 많은 아이들을 통해, 단순한 행동 뒤에 숨겨진 깊은 상처를 마주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조심스럽게 마음을 열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지만, 한 번의 따뜻한 눈빛과 진심 어린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직접 느꼈습니다.
아동기 외상 경험이 또래관계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다양한 심리 기제와 실생활 사례를 통해 분석하고, 보호자나 교사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에 대한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합니다.
1. 외상 경험 후 심리적 방어와 사회적 거리두기
외상을 경험한 아동은 심리적 방어 기제를 통해 자아를 보호하려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이는 때로 감정 무표현, 대인기피, 공격적 방어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실제로 제가 상담사 실습을 하던 시절, 교통사고를 경험한 후 유치원 친구들과의 놀이를 꺼리고 자주 혼자 있기를 원하던 아동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아이는 "다치면 아프니까 친구랑 안 놀래"라고 말하며 타인과의 관계를 피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타인에게 마음을 열었을 때 상처받을 수 있다는 내면의 두려움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처럼 외상을 경험한 아동은 관계 자체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되며, 특히 신뢰 형성이 중요한 아동기의 또래관계에서 심각한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외상이 반복되면 자아 방어 기제가 더 강해져 타인의 감정을 읽는 능력도 함께 둔화됩니다. 이로 인해 아이는 또래 집단 내에서 오해를 사거나 '혼자 있는 아이'로 분류되어 자연스럽게 고립되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2. 안정 애착의 부재와 관계 불안정성
아동기 외상이 또래관계에 미치는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은 안정 애착의 결핍입니다. 외상을 겪은 아이들은 신뢰할 수 있는 어른과의 안정적인 관계 경험이 부족한 경우가 많고, 이는 또래와의 관계 형성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칩니다. 제가 아동센터에서 자원활동을 하며 만난 한 아동은,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보호자와의 관계가 매우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또래에게도 쉽게 다가가지 못했고, 친구와의 놀이 도중 작은 다툼이 생기면 감정 폭발을 일으키거나 스스로 격리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는 안정 애착 없이 자란 아이가 갈등을 감정적으로 조절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반응이었습니다. 애착이란 단순히 부모와의 관계만이 아니라, 아이가 세상과 사람을 대하는 기본적인 &틀을 형성합니다. 이러한 틀이 불안정하면 또래와의 상호작용에서 신뢰를 쌓지 못하게 되고, 결국 관계 지속력에도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외상 경험은 이 기본 틀을 손상시키는 결정적 요소가 되며, 조기에 회복되지 않으면 또래 집단에서 반복적인 관계 단절을 겪을 가능성이 큽니다.
3. 사회적 위축과 행동 문제로의 연결
외상은 단순한 불안이나 회피를 넘어서, 장기적으로는 다양한 사회적 행동 문제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속적인 따돌림이나 학대를 경험한 아이들은 공격적이거나 과잉행동을 보이기도 하고, 반대로 극도로 수동적이 되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제 주변 사례 중 하나는, 유아기 때 이혼 가정에서 자란 한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 후 친구에게 장난감을 빼앗기자 곧바로 책상을 엎는 행동을 보였던 경우입니다. 교사나 부모 입장에서는 단순한 분노조절 실패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내면의 불안과 상실감이 분노로 전이된 것입니다. 외상을 겪은 아동은 위협을 매우 예민하게 감지하고, 작은 자극에도 과민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반응은 또래 집단 내에서 갈등을 유발하거나 배척을 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악순환은 시간이 갈수록 고착화되며, 결국 자존감 저하와 사회적 위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아동의 과잉 반응이나 위축된 행동 뒤에는 어떤 감정적 외상이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4. 회복을 위한 환경 조성과 관계 재훈련
외상을 경험한 아동이 또래 관계에서 회복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안전한 환경과 정서적 지지입니다. 이 부분은 저의 실제 경험에서도 확인된 바 있습니다. 지역 복지관에서 진행된 감정 인식 프로그램에 참여한 외상 경험 아동들의 경우, 프로그램 시작 전에는 또래와의 대화나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8주 후에는 눈을 마주치고 스스로 친구에게 말을 걸며 놀이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동 스스로에게 거절당하지 않는 안전한 관계를 체험시켜 주는 것입니다. 또래 간의 역할극, 협동 게임, 감정 표현 훈련을 통해 아이는 관계 형성의 긍정적인 경험을 얻게 되고, 그 경험은 외상으로 왜곡된 신념을 점차 회복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교사와 부모는 아이의 작은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긍정 피드백을 제공해야 하고, 무엇보다 네가 괜찮은 사람이야 라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전달해야 합니다. 이러한 관계의 반복은 아이가 타인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기반이 되며, 점진적인 사회성 회복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아동기 외상은 또래관계에 깊은 영향을 미치며, 자칫하면 사회적 고립과 정서적 문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호자와 교사가 정서적 지지와 환경 조성을 통해 긍정적인 관계 경험을 제공한다면, 외상의 흔적은 점차 회복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아이의 행동 너머에 숨겨진 상처는 없는지, 조금 더 깊이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부터 아이의 또래 관계를 따뜻한 눈으로 지켜봐 주세요.